Stray cat:: 인생은 거짓된 상황의 연속이다. (1)
카페 테라스에 앉아있는 여성은 묵묵히 책장을 넘겼다. 알리 파샤의 외동딸이었던 하이데가 이제 막 페르낭 드 모르세르 백작의 과거를 폭로하고 있었다. 그녀로 인해 명예가 바닥에 떨어진 페르낭은 자신의 아들을 충동질 해 몽테크리스토 백작과의 결투를 주도할 것이다.
테이블의 찻잔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무심하게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여성은 살짝 걸쳐진 무테 안경 덕분에 지적인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미인이었다. 짙은 버건디 색 정장 원피스는 선이 드러나는 정도로만 붙는 디자인으로, 어딘지 품위마저 느껴졌다. 러시안 블루 같은 머리카락은 아주 가벼운 웨이브가 들어가 어깨와 등으로 폭포수처럼 흘렀다. 그녀가 앉아있는 자리는 테라스 지붕에 그림자 진 응달로, 교묘하게 모습이 감춰져 있었다. 반드시 카페 앞을 지나가야만 그 존재감을 눈치 채고 그야말로 골목길의 우아한 고양이를 마주한 것처럼 저도 모르게 경외감마저 드는 자리 말이다. 덕분에 그녀는 필요 이상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피하며 독서에 신경을 쏟을 수 있었다.
모토마치 상점가의 중심 스트리트는 언제나 관광객과 현지인들로 이루어진 인파가 붐비는 곳이지만, 몇 블록만 빠져나가면 훨씬 한산하고 조용한 카페 거리가 줄지어 있었다. 가이드 북 어느 곳에도 않아 여행객들이 특히 지나치기 쉬운 곳이었지만, 이 거리를 즐겨 찾는 단골들은 오히려 그것을 반갑게 여기고 있었다. 몇 없는 휴식처를 방해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을 테니 말이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은 눈만 돌리면 거리가 변하기 마련이지만 -가게가 순식간에 폐점된다거나, 눈 깜짝할 새에 새로운 가게가 들어선다거나- 그렇지 않은 곳은 비교적 변화무쌍함이 적은 편이었다.
어느 카페 주인은 오늘도 손수 커피콩을 볶고 있었고, 어느 티 룸의 주인은 새로운 손님을 위해 물을 끓였다. 쿠키를 굽는 냄새, 매일 같이 강아지와 산책하는 노인. 꽃집의 아르바이트 생은 사장에게서 연분홍색의 장미가 피어난 묘종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여자가 책을 읽기 시작하고서 긴 시곗바늘이 반 바퀴 정도 돌아갔을 때, 맞은편 길목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훤칠한 키 때문에 얼핏 연령대를 착각하기 쉬운 남자였지만, 얼굴 반쪽을 뒤덮다시피 한 붕대에 가려지지 않은 눈매와 턱 선이 아직 소년답게 둥근 생김새의 그것이었다. 짙은 감색의 정장이 영 익숙하지 않은 듯 옷깃을 매만지면서도, 붉은 벽돌로 장식된 길바닥에 내딛어지는 구두 굽 소리는 경쾌했다. 소년은 어디로도 지나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카페로 들어갔다. 그리고 테라스에서 책을 읽는 여성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드러난 한쪽 눈매가 호선을 그리며 명랑한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안녕, 오늘도 아름다우시네. 누님.”
여자는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안경알 너머로 슬쩍 시선을 던졌다.
“그래. 멋있어졌네. 여성을 기다리게 하는 건 신사의 도리가 아니지만.”
“이런, 미안. 실수를 만회하려면 최고의 에스코트를 해 드려야겠군.”
“기대하지.”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 먼저 작은 웃음을 터뜨린 건 소년 쪽이었다.
“Ms. Nebelung의 연기 패턴은 잘 감상했어.”
“좀 더 괜찮은 접선 암호를 선정할 수는 없었어?”
장소는 나쁘지 않아. 이런 곳 좋아하니까. 여자는 그렇게 대꾸하면서 다시 책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반응에 소년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맞은편 의자를 당겼다.
“재미있지 않나. 유능한 미인 누님과 데이트하는 소년이라는 역할극이 어때서.”
“요는 괴롭히는 취미가 문제란 말이지.”
여자는 절반 이상 종이가 넘어간 책을 드디어 덮었다. 양장본 책의 녹색 표지에는 금장으로 유려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Le Comte de Monte-Cristo’.
몽테크리스토 백작. 소년, 다자이는 흥미를 가지는 척 했다.
“대중문학을 선호하나?”
“인쇄물이라면 뭐든 읽지. 소설이라면 더 좋고.”
“친구에게 배신당해 모든 것을 읽고 감옥에 간 남자가 복수귀가 되는 내용이라.”
사실은 흥미 따위 없었다.
“뻔한 이야기 아닌가.”
“이야기 중에 뻔하지 않은 건 없어.”
여자는 잠시 시선을 테라스 밖 거리로 던졌다가 다시 소년을 돌아보았다.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이 도시를 뒤에서 온전히 지배하는 포트 마피아, 그곳의 최연소 간부. 다자이 오사무는 씨익 웃어보였다. 마치 ‘그런 단순한 이야기를 왜 읽지?’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입 박으로 내지 않은 질문에 여자는 답했다.
“소설이란 인간 내면을 본뜬 탁본이라고 하더라고.”
“누가?”
“어떤 사람이.”
여자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얇은 스웨터 위에 갈색 앞치마를 두른 여자 종업원이 테라스로 다가오면서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다자이는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고 종업원에게 살풋 눈웃음을 보였다. 여자 종업원은 작게 숨을 들이킨 후 두 남녀를 힐끗 보고 돌아갔다.
“그래서 말인데.” 여자는 안경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 얇은 유리알에 가려져 있던 검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드러났다. “다른 연락책을 쓰지 않고 간부가 직접 접선을 시도한 이유는?”
대화의 흐름을 끊고 완전히 다른 화제를 꺼내는 화법이었다. 다자이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상대를 탐색했다. 검지 손가락이 박자를 맞춰 테이블에서 느릿하게 까닥였다.
“유능한 인물과 거래를 맺으려면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게 예의지.”
그 어느 집단에도 소속되지 않고, 다소 변덕이 강하지만 의뢰는 충실하게 수행하는, 일명 ‘고양이’. 암암리에 알려진 신원 정보는 미사키 류우네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 국적의 여성. 정보 수집, 사람 찾기, 암살, 첩보. 별로 깨끗하지 않은 그 어떤 의뢰라도 받아들이면 깔끔한 마무리는 반 이상 확정이라는 평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심볼이었다. 전 세계의 개미 떼처럼 많은 이능력자들 가운데에서도 눈앞의 여자는 단연 이질적인 이능을 지닌 인물이었다. 여자 개인의 가치를 환산하자면 밑도 끝도 없을 터였다.
다자이는 막 나온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우리 쪽 보스의 명령으로 자네의 행적을 조금 조사했다네. 과연 대단했어. 특히 바르셀로나 건은 말이야.”
“의뢰였으니까. 이유는 그 뿐이야.”
“그래서 말인데.” 같은 문장이 다른 입에서 나왔다. 다자이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 쪽에서 자네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하는 것은 어떻게 보는가?”
여자, 미사키는 말없이 자신의 찻잔을 들어 목을 살짝 축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다자이가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보스가 직접 제안을 걸어 온 거라네. 그 때문에 나도 자네 얼굴이 한 번 보고 싶어져서 나온 거고.”
“─거절.”
미사키는 단칼에 거절했다. 다자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등을 뒤로 살짝 젖히며 커피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런가.”
“이쪽도 엄연히 영업 중이라.”
“포트 마피아 뿐이 아닐 테지. 들어오는 러브콜들을 전부 쳐내는 이유가 있나?”
미사키는 잠시 말을 골랐다.
“혼자서 일 하는 게 효율이 좋아.”
“호오.”
다자이는 가볍게 납득했다. 과연,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다자이는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리고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렇다면 의뢰는 어떤가?”
“들어보고 결정하지.”
“의뢰를 받는 기준이란 게 따로 있나?”
“성공 확률.”
“액수가 아니라?”
“돈에 목 멜 정도는 아냐. 그렇다고 무보수 노동도 안 하지만.”
“이야기가 빠르군.”
심플한 대화는 진행이 매끄러워서 좋다. 그건 미사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몇 가지의 퍼즐을 정리하고 추려냈다. 어느 정도 생각을 마치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용두 항쟁에서의 잔존세력이 남아있다’?” 말꼬리를 올리며 그녀는 확인 차의 질문을 던졌다. 그 말에 다자이는 희게 웃었다. 부정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아 미사키는 저절로 눈썹 한 쪽의 치켜 올렸다.
“언제부터 포트 마피아의 마무리가 그 따위로 허술해졌지?”
용두 항쟁이라면 이미 10개월은 지난 이야기다. 그 시기에 미사키는 일본에 있진 않았지만, 요코하마에서 벌어진 그 피의 전쟁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포트 마피아의 뒤처리 방식이 얼마나 깔끔한지도. 그런데 그 마무리가 덜 끝나서 자신에게 의뢰를 맡긴다? 수지가 맞지 않았다. 그다지 어려운 의뢰는 아니지만.
그렇다면 나를 카드로 활용하겠다는 생각이군. 뭘 꾸미는 건진 몰라도. 미사키는 찻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도자기가 울리는 맑은 소리가 테이블을 메웠다.
검은색에 가까운 잿빛 눈과 다갈색의 눈이 마주쳐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다.
“이전 항쟁에서 우리 쪽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네. 그 탓에 물청소를 말끔히 끝내지 못했어. 쓸 만한 인력을 보충하려면 시간이 다소 걸리는데, 1년도 안 되는 시간으로는 무리잖나.”
“그거, 정확히는 의뢰가 아니라 고용의 형태로군.”
“자네 개인의 장사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을 걸세. 남는 자투리 시간을 이쪽에 써도 좋아.”
“배려인가?”
“보스는 ‘고양이’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말이지.”
“제안을 수락해서 얻는 메리트는?”
“확실하게 고정된 보수. 그리고 조직의 이름으로 이런저런 혜택들이 있을 걸세.”
“나를 회유하려던 조직들 중에 이런 수단을 안 쓴 사람이 없었는데.”
“사실은 그 이외에 더 있지만, 이건 보스에게서 직접 듣는 게 나을 테니까.”
간부가 밝힐만한 사항은 아니라는 뜻이다. 미사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더 이상 내용물 없이 비어버린 본차이나 찻잔을 응시했다. 그녀는 다자이가 겨우 눈치 챌 정도로 가늘게 웃었다. 오늘 하루 동안 그녀가 처음으로 지은 미소였다.
“일단은 수락하지. 의뢰의 연장선으로 취급하면 못 할 것도 없어. 정식 계약은 나중에 찾아가서.”
“그것 참 다행이군! 자네를 회유하지 못했으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해졌을 거야.”
다소 높은 톤으로 밝게 말하는 다자이에게 미사키는 더 환하게 웃어보였다.
“이번에 요코하마에 온 것도 의뢰 차 인건 알고 있을 거고, 내가 의뢰를 끝낼 때까지 그 타겟에게 손대지 말 것. 가계약으로 내 걸 조건으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미사키의 눈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들이 앉은 테이블로 이제는 그림자가 아니라 햇볕이 쏟아졌다.
홍차 침전물의 얼룩이 남은 하얀 찻잔에 금빛이 한 가득 새로이 담겼다.